▲ 번역을 통해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된 프랑스 어 원작 『오지히르』 /홍선화 기자 maximin@ 번역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본 적 있는가? 만약 번역가가 없다면 당신 책장에서 책이 1/4은 줄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출판물의 4권 중 3권은 번역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번역가는 제2의 창작자가 아니라 저자 뒤에 따라 붙는 단순한 옮긴이로 평가절하되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에서 굉장히 배가 고픈 것을 표현할 때 'avoir faim de loup' 라는 관용표현을 쓴다고 한다. 이를 직역하면 ‘늑대처럼 배고프다’란 뜻이다. 하지만 이렇게 번역해놓으니 왠지 문장의 뜻이 잘 와 닿지 않고, 단번에 이해하기도 어렵지 않은가? 전 세계적인 스테디셀러 『연금술사』를 번역한 최정수 번역가는 “차라리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걸신 들린 것처럼 배고프다’라는 표현이 더 알맞다”고 말한다. 이처럼 ‘늑대’를 ‘걸신’으로 바꿔 글의 감칠맛을 내는 사람이 바로 번역가다. 번역으로 가는 길에는 표지판이 없다 최 번역가는 “대학교 때 문학을 공부하고 대학원 때 잠시 프랑스 잡지 번역을 했다. 그 후 외국인 회사를 다녔지만 책이 좋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가 우연히 어린이책 번역을 시작했다”며 번역가로 입문한 계기를 밝힌다. 현재 번역가가 되기 위한 정식 과정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가마다 일을 시작하는 방식은 제각기 다르다. 번역가는 보통 출판사와 작품 계약을 맺고 일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번역가 모집 공고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서적의 저작권을 어떤 출판사가 소유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아 번역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번역의 세계로 진입하기는 쉽지 않다. 이같은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번역학교를 세운 강주헌 번역가는 “번역학교는 출판사와 번역가를 연결시키는 곳으로서 이제 시작하는 단계”라고 밝힌다. 영어 혹은 제2외국어만 잘하면 된다? 해당 외국어를 잘한다고 누구나 쉽게 번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특정 나라의 언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다고 해도 정작 우리나라의 문체나 어법 실력의 부족으로 독자와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책이 쓰여진 원어와 번역하고자 하는 언어, 두 언어를 똑같이 잘할 수 있는 것이 번역가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자질이다. 또한 번역하려는 작품의 배경인 문화와 텍스트 속의 문장, 단어의 뉘앙스를 알아야 한다. 최 번역가는 “해당 언어의 전공자라면 학교 수업에 충실하고 더불어 다른 분야의 책을 찾아 읽어야 한다. 문학과 비소설은 물론이고 미술과 영화 등 다른 분야를 아는 것도 번역에 도움이 된다”며 다양한 공부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일례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란 표현은 사실 ‘밧줄이 바늘구멍 통과하기’였다고 한다. 번역가가 밧줄이라는 뜻의 'gamta'를 낙타라는 뜻의 ‘gamla'로 혼동했기 때문. 이처럼 맥락에 숨은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오역이 되거나 피상적인 번역이 될 수 있다. 노하우에서 노웨어로 이처럼 외국어와 한국어를 잘 아는 것이 번역가가 되기 위한 기본조건이라면 번역가의 필수조건은 무엇보다도 전달력이다. 그래서 일반 서적의 번역에서 쓰이는 어휘는 중학교 2학년 수준에 맞추는 것이 관례다. 강 번역가는 “번역은 지식 민주화의 첨병에 선 사람이 외국 지식을 한국에 소개하는 것”이며 “문학의 경우 즐거움이 목적인만큼 독자가 읽는데 고통스러워서는 안된다”고 전한다.전문서적의 경우 과거에는 번역할 때 전문지식이 있는 것이 훨씬 수월했다. 하지만 요즘은 인문과학, 자연과학, 정치과학 등의 분야에서 전공의 경계가 없어지고 있는 추세다. 때문에 이제 번역을 할 때 미리 알고 있는 지식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올바른 곳에서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됐다. 강 번역가는 “적절한 정보 찾는 방식이 예전에는 노하우(know-how)였는데 반해 이제는 노웨어(know-where)인 시대”며 “중요한 것은 전공에 따른 지식이 아니라 다양한 상식이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에 대한 보편적 지식이 많아야 하고 신문에서 현재 사용되는 문체를 소화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직역이냐 의역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최 번역가는 “원칙적으로는 직역을 해야 하지만 가끔은 의역의 유혹에 시달린다”며 “이럴 경우 작가의 글쓰는 방식에 따라 번역을 하게 된다. 절묘하고 섬세한 문장을 자주 쓰는 작가는 주로 직역으로, 줄거리나 플롯은 독창적이지만 중간에 비는 듯한 문장을 사용하는 작가는 의역으로 번역한다”고 자신의 기준을 설명한다. 이처럼 작가의 글쓰는 방식에 맞게 번역 또한 달리해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세상에 다양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작가들의 언어도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역에서는 끊임없이 ‘직역을 할 것이냐, 의역을 할 것이냐’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예를들어 만약 'I am a boy'라는 문장을 직역하라고 하면 당신은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십중 팔구는 ‘나는 소년이다’고 직역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직역한 ‘나는 소년이다’는 사실 직역이 아닌 의역이다. 왜그럴까. 만약 직역이라면 'a'도 번역해야하기 때문이다. 이에 강 번역가는 “대부분 'a'를 번역하지 않는 것처럼 완벽한 직역은 있을 수가 없다”며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번역에서 직역과 의역의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독서의 역사』로 유명한 번역가 알베르토 망구엘은 “번역가는 원문에 담긴 모든 불완전함, 논리의 부족과 실수,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대목을 본다”고 말했다. 번역가보다 해당 작품을 자세하게 읽는 독자는 없다는 말이다. 최 번역가는 “번역은 텍스트와의 싸움이자 사랑이다. 텍스트를 끈질지게 붙잡아서 할 말을 알아내야 한다. 텍스트 속에서 방황하며 길을 잃고 다시 찾는 과정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바로 번역가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한국의 독자들에게 외국의 작품을 소개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번역하는 사람들. 그들은 책의 옮긴이를 넘어선 제2의 창작자였다. /조규영 기자 summit_k@ ▲ 전 세계적인 스테디셀러 『연금술사』, 『오지히르』의 최정수 번역가 /사진 홍선화 기자 maxi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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