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던 장마가 그치고 찌는 듯한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 경상남도의 작은 도시 밀양을 찾았다. ‘밀양(密陽)’이라는 지명이 의미하듯 빽빽하게 내리쬐는 볕이 밀양을 찾은 손님들을 맞이했다. 푸른 산에 둘러싸여 소담하게 자리한 밀양역 광장을 뒤로하고 그 뜨거움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 조선시대 3대 누각에 꼽힐 정도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영남루, 오늘날에는 공연 예술 공간으로 재조명받고 있다. 밀양 연극촌을 찾다 구성진 가락의 ‘밀양 아리랑’이 떠오르는 도시 밀양은 진작부터 공연예술의 도시로 이름이 났다. 무엇보다 그러한 이름을 갖기에는 ‘밀양 연극촌(아래 연극촌)’의 공이 가장 컸으리라. 밀양 시내에서 부북면을 거쳐 청도로 가는 24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보면 호젓한 곳에 자리한 마을을 찾을 수 있다. 허름한 폐교와 손때 묻은 극장들이 들어찬 연극촌은 지난 1999년 밀양시의 협조로 폐교인 월산초등학교를 무상 임대받아 생겨났다. 건물 하나에서 시작한 것이 해를 거듭할수록 하나하나 살림을 늘려 이제는 하나의 마을이 됐다. 연극촌은 우리 민족이 예전부터 가져왔던 굿, 판소리, 민요 등과 같은 문화 자산과 현대적 이야기를 융합한 현대 극양식을 구축하고자 만들어졌다. 단절된 우리의 전통을 ‘지금, 이곳, 우리의 극양식’으로 재창조하는 공연 예술 작업장인 것이다. 또한 이곳은 연출가 이윤택 감독이 이끄는 40여 명의 ‘연희단 거리패’ 식구들의 연극과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해마다 연극촌에서 주최하는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는 이제 비단 밀양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공연예술축제로 발돋움하고 있다. 연극촌이 자랑하는 연희단 거리패의 연극뿐만 아니라 국내외 유명 작품들을 맘껏 볼 수 있는 공연예술축제로 매년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더구나 올해로 제7회를 맞는 이번 축제는 젊은 연출가와 대학생의 참가작이 많아 더욱 눈길을 끌었다. 올해에는 ‘연극, 세상 속으로 들어가다’라는 모토로 지난 7월 20일부터 8월 5일까지 연극촌에서 뿐만 아니라 밀양시 곳곳에서 진행됐다. ▲ 밀양 연극촌 입구 옆에 자리잡은 숲의 극장

연극, 일상을 만나다

연극촌에 들어서자 덩그러니 자리한 마당과 함께 갓 못질을 한 듯 투박한 모습의 극장들이 눈에 띄었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폐교를 개조해 쓰이는 사무국으로 들어가 보았다. 축제의 진행이 막바지에 다다름에도 불구하고 사무국 내부에는 여전히 분주한 움직임이 일렁였다. 그러한 분주함 사이로 들리는 노래 소리가 건물 한편으로 발걸음을 잡아당겼다. 프린지(독립예술) 공연에 참가한 밀성 제일여고 학생들이 더위도 잊은 채 힙합 공연 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번 축제에서는 연극 사이사이에 이와 같이 밀양 시민들이 준비한 힙합 공연이나 마술, 뮤지컬 갈라쇼 등을 선보여 직접 축제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뒀다.

사무국을 중심으로 빙 둘러싼 공연장에서배우들의 리허설이 계속됐다. 조심스레 들어간 연극실험실에서는 젊은 연출가전으로 출품된 작품, 『아름다운 여인 사리타』의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었다. 대폿집을 배경으로 원형테이블에 모여 앉은 연극인들의 진솔한 술자리를 담아내는 장면이었다. 캄캄한 조명아래 모두가 숨죽여 그 모습을 감상했다. 리허설임에도 연극의 긴장감과 배우들의 열연이 지긋이 마음을 울려댔다. 또한 땡볕 아래 숲의 극장에서는 대경대학교 연극영화방송학부 학생들이 출품한 『천하』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에 온몸이 땀범벅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꼼꼼히 무대를 점검하고 배우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잡아주는 학생들의 눈빛에서 연극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읽을 수 있었다.

   
▲ 연습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열정은 무대 위 못지 않았다.

리허설이 한창인 극장을 빠져나와 외부를 둘러보니, 극장 사이사이의 마당에는 갖가지 배우들의 옷이 여기저기 널려있고 연극에 쓰임직한 소품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러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니, 연극촌이 그냥 우리네가 살고 있는 마을과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들어내는 연극 또한, 억지로 지어내는 데서 오는 거리감보다는 꾸밈없이 다가오는 진솔함을 간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우리의 일상 그대로의 모습처럼.

밀양을 두드린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밀양 시내의 영남루에 불이 켜졌다. 그리곤 희미한 불빛을 따라 연극을 보기위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연극 시간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늘어나 영남루 야외무대를 빼곡히 채웠다. 연극촌에서는 ‘연극, 세상 속으로 들어가다’라는 이번 축제의 모토에 맞게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문화재를 연극의 무대로 바꿔놓았다. 시민들의 일상에 좀더 가깝게 연극을 가져다 놓기 위한 노력의 일환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다.

마침 찾아간 날에는 국내 최초의 넌버벌(Non-verbal) 퍼포먼스로 잘 알려진 ‘난타’ 공연이 있었다. 한국 전통의 사물놀이에 외국의 뮤지컬 요소를 가미해 만들어진 난타를 사방이 트인 영남루에서 즐기는 재미가 꽤나 매력적이었다. ‘밀양을 두드린다’는 소개로 공연이 시작되자 무대 뒤쪽에서 요리사 복장을 입은 배우들이 등장했다. 악기소리와 ‘찌르르르’ 매미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묘한 조화를 이뤄냈다. 공연이 계속되는 동안 어르신, 꼬마, 아주머니 할 것 없이 흥이 난 관객들은 그들의 시원한 두드림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배우들의 흥겨운 두드림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밀양강 바람과 함께 한여름의 더위를 말끔히 잊게 했다. 그날 밤 영남루는 문화재가 가지는 전통과 ‘난타’라는 새로운 퓨전 장르가 대표하는 현대, 그리고 시민들의 일상과 연극 무대의 경계를 허무는 장이 됐다.

다음날 날이 밝자 다시 영남루에 올랐다. 시원하게 뻗은 밀양강 물줄기와 소담스럽게 모여 있는 밀양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지난 밤 영남루를 가득 채웠던 축제의 열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기억만이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글 이승희 기자 unique_hui@yonsei.ac.kr
/사진 김평화 기자 naeil@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