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생원은 계집과는 연분이 멀었다. 얽둑빼기 상판을 쳐들고 대어 설 숫기도 없었으나 계집 편에서 정을 보낸 적도 없었고, 쓸쓸하고 뒤틀린 반생이었다. 충줏집을 생각만 하여도 철없이 얼굴이 붉어지고 발밑이 떨리고 그 자리에 소스라쳐버린다. 충줏집 문을 들어서서 술좌석에서 짜장 동이를 만났을 때에는 어찌 된 서슬엔지 발끈 화가 나버렸다.
봉평 장터를 지나 위로 올라가다 보면 허생원이 동이에게 심술을 부렸었던 충줏집이 나온다. 금방이라도 잔치 뒷마당 같이 어수선하게 술판이
벌어질 것 같은 이곳에서 질투에 눈이 먼 허생원은 동이의 뺨을 때렸더랬다. 지금은 너른 공간 한쪽에 조그만 무대가 놓여있는 것을 보니 주민들의
문화생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나보다. 이전 장돌뱅이들의 쉼터가 이제는 주민들의 쉼터가 된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친목을 도모하는 장소로 이용되는 것을 보면 충줏집은 오늘날의 웬만한 카페가 부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충줏집 뒤편에 당나귀 서너 마리가
묶여있는 것을 보고는 반색하며 달려갔다. 허생원의 장돌뱅이 삶에서 당나귀를 빼놓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에게 있어 당나귀는 반평생을 함께하면서
같은 주막에서 잠자고, 같은 달빛에 젖으면서 장에서 장으로 함께 걸어 다녔던 친구이자, 이십 년 세월 동안 같이 늙어버린 자신의 분신 같은
짐승이었다. 오죽하면 투전에 전 재산을 잃었을 때도 ‘애끓는 정분’에 차마 당나귀는 팔지 못했을까. 직접 눈으로 본 당나귀는 상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큰 덩치에 제법 튼튼해보였다. 어쩐지 허생원의 삐쩍 마른 당나귀와는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도 꼭 한 번의 첫 일은 잊을 수가 없다.
“달밤이었으나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 지금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 없어.” 허생원은 오늘밤도 또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려는 것이다. 조선달은
친구가 된 이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렇다고 싫증을 낼 수도 없었으니 허생원은 시치미를 떼고 되풀이할 대로는 되풀이하고야
말았다.
▲ 허생원에게 물레방앗간의
추억은 흩어지는 물방울처럼 아름답게 남아있다 /조형준 기자 soarer@
충줏집에서 나오면 개울 건너편 물레방앗간이 있는 곳까지 긴 다리가 연결돼 있다. 그 개울은 물에 빠진 허생원을 동이가 들쳐 업고 건넜던
곳이다. 동이의 출생 사연을 듣고, 또 왼손잡이인 그를 보면서 허생원이 어렴풋이 ‘내 아들이 아닐까’하는 기대를 하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장마에 떠내려갈 정도로 약했던 섶 다리 대신에 번듯하게 튼튼한 다리가 놓여있어서 수월하게 건널 수 있다.
다리 건너 오른편에는
허생원이 성 서방네 처녀와 꿈같은 하룻밤을 지새웠던 물레방앗간이 자리 잡고 있다. 물레방앗간에서의 ‘그날 밤’을 회상하며 두고두고 이야기하는
허생원, 그리고 그 이야기를 싫증도 내지 않고 들어주는 조선달의 모습이 떠올랐다. 환한 달밤에 봉평서 제일가는 미인을 마주친 그의 가슴은 얼마나
설레었을까. 또, 마음이 울적하던 때에 낯선 이를 만난 성 처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삐그덕’ 대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물레방아를 보고 있자니
허생원과 성처녀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원래 물레방앗간 주변은 온통 메밀밭이기 때문에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 이어야 했지만, 우리가 찾았을 때는 아쉽게도 아직 메밀꽃이 만개하지 않았었다. 때문에 우리는 직접 메밀꽃을
찾아 나서야 했다. 햇빛에 반사돼 하얗게 빛나는 것을 발견하고 뛰어 갔다가 허탕 치기를 여러 번, 그동안 신발은 흙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
마침내 장돌뱅이처럼 순박한 메밀꽃을 발견했을 때, 나는 정신없이 그 순박함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동이와 함께 제천으로 떠나는 허생원의
마지막 뒷모습이 떠올랐다. 작가 이효석은 마지막까지도 이렇게 무수한 암시만을 던져둔 채 이야기를 끝맺는다. 그리고 우리는 곧 즐거운 상상을 하기
시작한다.
성 처녀와 허생원이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밭에서 재회하는 모습을.
/글 강조아 기자 ijoamoon@
/사진 김영아, 조형준 기자 soar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