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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행]모항, 이곳에서 너를 기다린다
  • 위문희 기자
  • 승인 2007.03.26 00:00
  • 호수 1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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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메케한 공기에 무뎌진 후각을 되살리고 싶었다. 필사적으로 도시의 메마른 바람 속에 실려 왔을지도 모를 싱긋한 갯내음을 찾는다. 마침내 찾아낸 그 냄새는 기다렸다는 듯이 낯선 바닷가 마을로 발걸음을 이끈다.

▲ 모항 앞바다에 매여 있는 수척의 배들이 아침 해를 맞이하고 있다.

30번 해안도로를 타고 격포와 줄포를 지나 곰소로 향하는 길목에서 부안군 변산면 도청리 남쪽 끄트머리에 둥지를 튼 아담한 마을을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늦게 진다는 전북 부안의 모항마을. ‘모항’하면 으레 소개되는 안도현 시인의 「모항으로 가는 길」 덕분에라도 이제는 그리 낯설지 않다. 마을에 도착하면 짭짤한 바닷바람은 물론이거니와 여느 바닷가와는 다른 ‘사람 내음’이 느껴진다. 이곳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시인 박형진(50)씨의 글을 통해 살갑게 묻어나기 때문이다. 농사짓고, 글 짓는 것이 삶 자체인 그가 고향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솜씨는 보통이 아니다. 지난 1992년 『창작과 비평』 봄 호에 「봄편지」 외 6편의 시를 발표하며 이름을 알린 박 시인은 모항에서 나고 자라 여태 이 동네에 머물고 있는 ‘모항 토박이’다.

그가 내게 전해준 말

풀여치 앉은 나는 한 포기 풀잎
내가 풀잎이라고 생각할 때
그도 온전한 한 마리 풀여치
………
비로소 나는
이 세상 속에서의 나를 알았다.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를
오늘 알았다.

박형진 시인의 「사랑」 중에서

‘사랑’에 대해서 운을 떼려면 풀여치와 물아일체의 경지에 빠진 박 시인에게 적어도 한 수 배워야 할 것이다. 그는 이웃마을 문병을 다녀오는 길에 도청리 뚝길 위에서 이 시의 시상을 떠올렸다고 한다. 정식으로 문학 수업을 받은 적도 없다는데 자신의 문학관을 또박또박 힘줘 말하는 모습에서 ‘시인 박형진’이 보였다. 그는 “농촌에는 그냥 풀어놔도 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들이 많다”고 말한다. 물론 이야깃거리들이 워낙 구미가 당기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의 산문집이 자꾸만 끌리는 까닭은 꼴까닥 침 넘어갈 듯 맛깔스러운 글솜씨 때문일 게다. 농민들과 독자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심정으로 글을 써내려가는 그 모습에서 고향에 대한 질긴 정이 엿보인다.

활처럼 굽은 하얀 백사장이 인상적인 모항. 고풍스러운 옛 어촌의 모습을 기대할 순 없어도 바닷가에 매어진 수척의 배들이 삶의 체취를 물씬 풍긴다. 도시의 메마른 아스팔트가 훨씬 익숙하겠지만 한번 백사장 가득 깔려있는 하얀 모래를 밟아보라. 촉감이 아주 좋다. 밤에 거니는 모항의 해변은 외부와 단절된 선사에서 수행하는 선비처럼 속세에 찌든 심신을 달래기에 더없이 적합한 장소이다. 백사장을 쉬거니 걷거니 하면서 한 바퀴 돌아보는데 달빛이 벌써 저만치 도망가 버렸다. 박 시인은 농촌이 도시로 변모하는 첫번째 관문이 ‘도로’라고 했다. 아침에 햇빛이 비추는 모항마을은 해변 진입로를 넓히기 위한 도로공사가 한창이었다. 개발이 계속되면 모항을 찾는 사람들이 더욱 늘겠지만 그들이 모항 그대로의 소박한 모습에 더 신경써줄 수 있을까. 모항의 바다와 백사장과 갯내음을 그대로 안고 돌아갈 수 있을까.

시인이 사는 바다, 모항

“나무든 돌이든 흙이든 자연에서 모두 구할 수 있으니깐 쓰러져도 상관없다”며 박 시인은 파란 하늘 아래 붉은색이 선연한 황토빛 흙집으로 우리를 이끈다. 널찍한 대청이 돋보이는 서남해안 지방의 전통적인 가옥이다. 따로 사립문이 없는 안채의 각 기둥에는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우순풍조(雨順風調)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건양다경은 햇빛이 많이 들고 올 한해 경사가 많아라, 우순풍조는 비와 바람이 순조로워 한해 농사가 풍년이 들라는 뜻이라고.

▲ 박형진 시인이 손수 지은 안채와 사랑채는 탁트인 전경을 자랑한다.

아직은 마무리 공사가 덜 된 사랑방으로 안내한다. 방에 들어서면 눈에 제일 먼저 띄는 것이 바로 방바닥을 도배한 종이장판이다. 양조장에서 얻어온 밀가루 포대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그 구수한 질감이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는 바닥을 만지작거리며 “장판을 발랐다가 쎈 콩을 물에 불려서 짜낸 즙을 다시 바르고 불을 뜨끈뜨끈 지피면 콩기름이 먹어서 종이 장판이 완성된다”고 쑥스러워하면서도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처음에 아내는 다시 바르라고 난리였지만 후에 이 집 사랑방에 놀러온 민족문학작가 회원들이, 특히 이종구 작가의 칭찬이 거해서 성화가 수그러졌다고 한다.

시집 준비하랴, 짓던 사랑채마저 지으랴, 농사지으랴, 애들 학교 보내랴 올 한해 무척이나 바쁠 것 같다는 박 시인. 가득 쌓인 장작을 보고 한번 패보겠다고 나서자 들고 있던 도끼를 건넨다. 모양새가 이쁘진 않지만 제법 장작을 패보이자 “욕봤다”며 걸쭉하게 한마디 내뱉는다. 이마에 주름이 네 줄, 까무잡잡하지만 고운 피부, 얇지만 야물 찬 입술, 흰 머리는 보이지 않고 대신 숱이 적은 까만 머리가 정정함을 느끼게 해준다. 꾸밈이 없지만, 만만치도 않다. 모항에서 만난 그는 짭짤한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처럼 옹골차고 허물없는 사람이었다.

▲ 박형진 시인이 머쓱해하며 종이 장판을 보여준다.

항기로 떠난 여행

내 마음이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하게 하다


- 내소사 설선당에서 -

모항만 둘러보고 부안을 떠나기 못내 아쉽다면 모항에서 곰소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내소사에 들러보자. 내소사는 찬찬히 뜯어보면 뜯어볼수록 감탄하게 되는 절집이다. 절을 둘러싼 풍광이 좋아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과 『대장금』의 촬영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이어지는 전나무 숲길을 걷다보면 침엽수 향내가 은은히 풍겨온다. 소박하면서도 웅장한 대웅전의 모습도 압권이거니와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섬세한 꽃창살을 바라보면 절로 찬사가 터져 나온다.

눈을 감고, 코로 깊게 그리고 천천히 공기를 마셔본다. 그리고 공기 속에 숨어있는 모항의 짭짤한 바닷바람, 박 시인의 다부진 글 솜씨, 산사의 고즈넉한 정취의 흔적을 더듬어본다. 희미하지만 분명히 풍기는 냄새, 그것은 부안에서만 맡을 수 있는 ‘내 마음의 고향’에서 풍겨오던 향기였다.

/글 위문희 기자 chichanmh@yonsei.ac.kr
/사진 송은석 기자 insomniaboy@yonsei.ac.kr

위문희 기자  chichanmh@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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