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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이 가면 그뿐/숙취(宿醉)는 지전(紙錢) 속에서 구겨지는데 기형도를 읽으며 밤을 잡아먹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런 날은 언제나 봄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난 겨울, 밤 11시가 넘으면 언제나 나는 기형도 생각이 났었던 것이다. 그의 음울하고 안개 같은 언어들이 밤이면 나의 목덜미를 핥으며 귀에서 코끝까지 애무하며 지나갔으니 이 얼마나 고약한 일인가. 나에게 봄은 잔인하지 않았다. 봄날에는 기형도의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던 것이다. 허나 이제 완연했던 봄도 다 갔다. 다시 그의 언어들이 병사처럼 나의 주변에 진주해 온다. 원래 그런 것이다. 봄날은 가면 그 뿐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시장에 간 우리 엄마/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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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훈 기자
2005.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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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엄마가 죽었다’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로 카뮈의 은 시작된다. 허나 화자는 담담하다. 그에겐 슬픈 기색이 없다. 엄마의 시신을 마주하고서도 그는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너무 슬퍼서 말을 하지 못할 지경이 된 게 아니다. 그는 다만 무감각하고, 슬픈 상황에 끼어들지 못할 뿐이다. 슬픔이란 감정에서 마저도, 화자에게는 철저한 ‘이방인’이다. 영화는 때때로 우습기도 했지만 정말 너무 시시했다. 마리는 다리를 내 다리에 대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젖가슴을 어루만졌다. 영화가 끝날 무렵 키스를 한다는 것이, 서투르게 되고 말았다. 영화관을 나와 그녀는 내 집으로 왔다. 장례식이 있은 지 하루도 안 됐을 때의 모습이다. 엄마의 죽음이 그의 일상을 흐트러뜨리진 못했다. 애당초 슬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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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훈 기자
2005.04.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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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네. 역시나 ‘말’은 참으로 재미있고 오묘하며 무궁무진한 호기심을 갖게 한다. ‘견딜 수 없다’는 메시지는 그야말로 절박한 상황을 표현한다. 헌데 이러한 심각한 상황에 어미 ‘~네’가 붙었다. ‘~네’로 끝나는 문장은 현실에 직접 끼어들지 않고 바깥에 서서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흐뭇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있다. ‘견딜 수 없다’는 절박한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투. 이러한 ‘메시지’와 ‘말투’의 불협화음은 (비록 이 둘 사이의 아이러니를 눈치 챌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읽는 이의 눈길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삶의 고단함에서 충동적으로 내뱉은 투덜거림이 아니라 적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깨달은 삶의 성찰의 결과라는 사실을 읽는 이들은 무의식중에 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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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훈 기자
2005.03.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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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사이든 애인사이든 친구사이든 모녀사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이임에도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고 갈등의 가능성은 언제 어디서나 독사처럼 혀를 날름거린다. 이러한 모든 관계의 비극은 바로 나와 당신이 서로 ‘타자’라는 사실 때문이다. 개인성의 발현이 극대화될수록 자의식이 명료해져야 마땅할 듯 보이는데, 현대의 개인주의는 자신의 명료한 정체성을 나타내주기는커녕 타자와의 이해 및 소통을 더욱 방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인의 외로움은 아마 여기에 그 이유가 있으리라. 이유야 어찌됐건, 자신의 모든 정체성은 타자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결국 자아의 실체를 뚜렷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타자와의 소통과 이해가 필수적이다. 20세기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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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훈 기자
2005.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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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로가 다시 숨을 쉰다. 깔깔거리는 활기찬 꽃들, 캠퍼스에선 봄꽃이 피기 전에 이미 꽃이 폈다. 약동하는 3월의 첫째 주, 파블로 네루다의 심장타령이나 어울릴 법한 이 계절에 분위기 파악 못하는 작품 하나가 나를 사로잡는다. 찬물을 끼얹어도 유분수지. 시작하는 마당에 웬 아무럴 것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밋밋한 제목의 작품 타령인가. 새로움을 맞이하는 시작점에 선 지금,『그 후』에 마음을 한 번 빼앗겨 본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오른손을 심장 위에 얹고 늑골 끝에서 정상적으로 뛰고 있는 맥박 소리를 확인하면서 잠을 청했다. 심장 소리에 경청을 하는 것은 요사이 생긴 다이스케의 습관이다. 격렬한 피의 흐름과 심장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일 만큼 그는 삶 그 자체를 느끼면서 살아간다. ‘생(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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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훈 기자
2005.02.25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