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쏴아’ 망망대해 위로 자욱이 어둠이 깔릴 무렵, 기자단을 태운 어선은 파도 위를 시원하게 가른다. 오징어축제 둘째 날, 오징어잡이 취재를 위해 이곳 울릉도까지 달려온 기자단은 앞뒤 생각할 것 없이 오징어조업체험승선에 몸을 맡겼다. 지난 이틀 동안 저동항에서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바다 위를 질주하려니 숨이 탁 트이는 게 흥취가 감돈다. “그러다 바다에 나자빠져뿌도 난 몰라요.” 어선 위를 이곳저곳 헤집고 다니는 기자들에게 선장은 연신 주의를 준다. 꺼무잡잡한 얼굴에 숫접음이 절로 묻어나오는 ‘대복’호 선장 손모익씨(55). 울릉도에서 태나고 자란 그는 지금까지 오징어잡이만 30년째란다. 어릴 때부터 오징어잡이 배에 종종 승선했다니 그야말로 일생을 오징어와 함께 한 ‘오징어인생’이다
“자신의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상냥한 초보자다. 모든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보는 사람은 이미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전세계를 하나의 타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완벽하다.” 이 말은 12세기에 살았던 성직자 성 빅토르 위고가 남긴 것으로, 에드워드 사이드의 『문화와 제국주의』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중세말에 살았던 한 지식인이 통찰한 진정한 세계인의 초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실로 작지 않다. 이 진술 안에는 세계화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현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전세계를 하나의 타향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제까지 우리를 규정해 온 삶의 조건에 지혜롭게 거리를 두는 것이자, 근대적 경계를 단숨에 뛰어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서로 이질적인 것들의 뒤섞임, 퓨전(fusion). 이러한 ‘퓨전’은 라틴어에서 ‘섞다’라는 의미를 가진 ‘fuse’가 영어식으로 명사화돼 탄생했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과학주의가 강조되던 모던시대를 지나, 견고한 이성이 구축해 놓은 옛 질서를 해체시키고 뒤섞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퓨전시대. 우리는 클래식과 팝을 넘나드는 ‘바비 맥퍼린(Bobby McFerrin)’의 곡을 듣고 인문학과 추리가 만난 『다빈치 코드』와 같은 소설을 읽는다. 굳이 이러한 예술 영역을 차치하고서라도, 퓨전은 우리의 음식과 옷, 심지어 우리의 사고 영역까지 닿아 있다. 퓨전의 시작 퓨전은 서로 다른 배경에서 출발한 문화가 하나로 융합돼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다.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고자 하는 욕
언제부턴가 식탁에 불기 시작한 맛깔스러운 변화의 바람이 그칠 줄을 모른다. 우리는 그러한 변화의 경향을 “퓨전 요리”라고 통칭하고 있다. 사실 퓨전 요리의 발원지는 미국 서부 지역이다. 일찍부터 아시아 이주민들을 통해 동양의 음식문화를 접할수 있었던 이 지역에서는, 미국인에게 심각한 비만과 성인병의 원인을 음식문화에서 찾았다. 그리하여 동양 요리의 재료와 조리법이 지닌 장점을 서양 요리에 응용·융합시키려고 한 것이 퓨전 요리의 출발이 되었다. 이것이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그 의미가 확대되어, 기존 음식이 가진 서로 다른 조리법이나 재료를 융합시키는 것을 모두 퓨전 요리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실생활과의 밀접성을 파고든 다양한 시도와 상업적 변형으로, 이제 퓨전 요리는 가장
‘MP3야, 디카야?’ 최신 휴대폰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요즘 휴대폰은 한가지 기능만 뛰어나서는 소비자들에게 사랑받지 못한다. 휴대폰과 MP3, 디지털카메라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이른바 ‘퓨전제품’이다. ‘융합’을 의미하는 ‘퓨전(fusion)’이 음악과 요리를 거쳐 경영에도 도입되고 있다. 퓨전경영이 업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퓨전경영이란 제품, 기술, 서비스 등과 같은 경영의 제반 활동들이 양자 택일의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부족한 부분을 메워 상생의 길로 나아가려는 일련의 경영 혁신 활동을 의미한다. 상품권과 신용카드가 결합된 ‘기프트 카드(Gift Card)', 은행업과 보험업이 결합된 ‘방카슈랑스(Bancassurance)’가 그 대표적인 예다. 경영 방식도 예외가 아니다. L
1990년대 초, 많은 아이들이 밤을 밝히며 탐독했던 만화책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드래곤볼』. 이 만화책에서 오공의 손자 ‘오천’과 배지터의 아들 ‘트랭크스’는 자신들보다 훨씬 강한 적과 맞서기 위해 ‘퓨전’을 시도, 이전의 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오천크스’를 탄생시킨다. 오천크스를 기억하는 소년들이 훌쩍 커버린 지금, 퓨전이란 코드가 다시금 밀물처럼 다가와 우리사회 전반을 뒤덮고 있다. 오천크스의 힘만큼이나 우리사회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지니게 된 퓨전, 하지만 그것이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닌 듯하다. 새로움인가, 정체인가 ‘퓨전은 문화의 ‘새로움’과 ‘정체’에 대한 이중 간증이다.’ 문화평론가 노염화씨는 그의 글 「퓨전문화-뒤섞음 속에서 피어나는 가능성 혹
‘퀴어러브스토리’. '번지점프를 하다'는 일반 멜로에 동성애가 섞이면서 ‘퀴어러브스토리’라는 새로운 장르로 탄생했다. 이제 영화를 멜로, 호러, 액션, 코미디 등으로 나누던 전통적인 분류법은 무의미해지고 있다. 영화산업에도 이른바 ‘퓨전’바람이 불고 있다. 시나리오 창작센터 조재홍 연구실장은 “컴퓨터 그래픽의 발달이 퓨전영화의 생산을 촉진했다”고 말한다. 컴퓨터 기술의 발달로 인해 영화는 애니메이션처럼 자유롭게 장르를 넘나들게 됐다. 이어 조실장은 “이러한 장르 혼성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양상”이라고 분석했다. ‘갗아니면 ‘나’라는 사고방식을 넘어 ‘갗와 ‘나’를 섞는 색다른 시도가 활발해진 것이다.이런 퓨전영화의 대표적인 예는 영화 '매트릭스'다. 공상과학이라는 장르에 긴 코트를 휘
칠흑같은 어둠이 가득한 무대 위에 파란 야광빛의 도깨비불이 허공을 가른다. 도깨비 나라에 가게된 인디밴드와 도깨비의 리듬 대결. 강렬한 타악기의 리듬이 관객의 귀를 통해 온몸에 전율을 일으킨다. 귀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오감으로 즐기는 연주. 지난 8월 1일부터 스타식스 정동 아트홀에서 공연되는 『도깨비 스톰』같은 퓨전공연이 최근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퓨전공연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0년대 사회 전반에 불어온 퓨전 바람을 타면서부터다. 초기에는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공연이 보여주는 국악과 클래식의 만남처럼 서구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을 융합한 형태의 공연이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근래의 퓨전공연은 단순히 동서양의 융화를 넘어서 이질적인
‘퓨전전공’ 또는 ‘퓨전교육’.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말들이지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전공의 퓨전화’는 대학 내에 서서히 퍼져가고 있다. 퓨전전공은 연합전공, 복합연계전공 등 다양한 이름으로 시행되고 있지만 학문의 통합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얻겠다는 의도를 공유하고 있다. 퓨전전공을 통해 서로 다른 영역의 학문이 결합, 독특한 전공 영역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기술융합은 과학의 미래다 이러한 추세는 그동안 세계적으로 경쟁력있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끊임없이 기술 간의 융합을 시도해온 이공계 분야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전통산업에 첨단기술을 접목시킨 자동차 텔레메틱스가 두 가지 이상의 인접 학문이 결합된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텔레메틱스는 자동차, 항공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