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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똥집보다는 ‘Chicken Gizzard’란 단어가 더욱 어울리는 동네, ‘Dollar Exchange’라고 씌어진 환전상이 즐비한 동네. 바로 미군 제2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경기도 동두천시 보산동 캠프 케이시 앞, 소위 ‘기지촌’이다. 벚꽃이 우수수 떨어질 무렵 찾아간 이 동네에는 고요함과 한적함을 넘어 을씨년스러움마저 감돌고 있었다. “30분 동안 이 가게에 손님이 몇 명이나 오는지 보라고.” 이 동네에서 30여년째 보세 옷가게를 운영하고 있다는 정인근씨의 말이다. 실제로 기자가 있었던 30분 동안 이 가게를 찾은 손님은 손으로 꼽을 정도. 정씨는 “하루 매상이 예전의 20% 수준으로 급락했다”며 “이 동네에는 미래가 없어 곧 타지로 이주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에는 과거 달러
특집
정진환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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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현 교수(경영대·생산관리)는 지난 1979년 우리대학교 경영학과를 마친 동문이다. 우리대학교 창립 120주년을 맞아 김교수와 함께 교정을 거닐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지난 4일 낮 1시 김교수를 청송대에서 만났다. 정진환(아래 정): 청송대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요? 김태현(아래 김): 다들 ‘청’자가 푸를 ‘청’자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들을 ‘청(聽)’에 소나무 ‘송(松)’, 소나무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야. 용재 백낙준 박사가 지으신 이름이지. 아, 저기 비석에 글씨가 새겨져 있네. 참 멋진 이름 아닌가? 정: 네. 정말 그렇네요. 교수님의 학창시절 청송대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김: 지금은 공연도 많이 하고 단체 소풍도 많이 오는데 옛날에는 지금보다 숲도 더 울창하고
특집
정진환 기자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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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 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아무것도 모르는 촛불들아, 잘 있거라/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 「빈 집」 중에서 처녀시집이자 유고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을 통해 기형도 시인(지난 1985년 정치외교학과 마침)은 ‘1980년대 윤동주’로 불린다.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져 가세가 기울고 불의의 사고로 누이가 죽는 등 불우한 유년시절을 겪은 그는 어릴 적 느낀 죽음과 절망, 불안과 허무의 이미지를 이후 자신의 시에서 개성적인 문체로 표현했다. ‘연세문학회’에서 활발한 시작(詩作)활동을 한 기형도 시인은 우리신문사가 제정한 ‘박영준 문학상’ 소설부문, ‘윤동주 문학상’ 시부문에 응모해
특집
나은정 기자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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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의 사슬은 두 손으로 뿌리치고 짐승의 철퇴는 두발로 차버리자 그대 끌려간 그 자리 위에 민중의 웃음을 드리우자 - 이한열 추모비에 새겨진 이한열 유고시 중에서 전두환 군부정권의 폭압적 통치가 최후의 몸부림을 칠 무렵, 그들이 뺏을 수 있는 마지막 생명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당시 21살의 청년 이한열(지난 1986년 경영학과 입학). 이한열 열사는 지난 1987년 6월 9일, 경찰의 고문을 받다 숨진 박종철씨의 사망 1백일을 추모하는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서 전경을 저지하는 사수대의 역할을 하던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았다. 최루탄에 맞은 그는 한달여 동안 사경을 헤매다 7월 5일 결국 숨을 거뒀다. 나흘 뒤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진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는 1백만명
특집
이상민 기자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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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구석기 시대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 지금은 누구나 당연시하는 이 사실이 불과 40여년 전만 하더라도 근거 없는 주장이었다. 손보기교수(퇴임ㆍ고고학)는 공주군 석장리에서의 구석기 유물 발굴로 구석기 역사를 최초로 증명했다.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재학하며 사학 연구의 꿈을 키워온 손교수는 한반도에 구석기 시대가 존재할 수 없다며 유물 발굴을 강경하게 반대한 정부로부터 어렵게 발굴 허가를 받아내 대학원 사학과와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손교수가 지난 1967년 발표한 유물 발굴 결과는 한반도의 역사를 30만년 앞당기며 세계인의 감탄을 자아냈다. 한편, 손교수는 발굴 유물에 우리말 이름을 붙였다. 그는 타제석기, 마제석기를 뗀석기, 간석기로 바꾸고 찍개, 긁개, 주먹도끼 등 우리말 이름을
특집
최아란 기자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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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정학 교육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최이순 교수는 가정학 분야에서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여성’이라는 사회적으로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국의 가정학 교육의 기초를 세우고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오리건 주립대 공로표창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다. 최교수는 193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정과를 졸업한 후 1938년 미국 오리건 주립대 대학원을 거쳐 1939년에는 모교에서 처음 강단에 서게 된다. 그녀는 지난 1956년 우리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겨면서 ‘연세’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 후 최교수는 지난 1964년 가정대학 학장, 1968년에는 생활과학연구소장을 거치며 지난 1977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우리대학교에서 가정학 교육에 전념하게 된다. 또한 그녀는 초대
특집
최욱 기자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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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대를 학문 연구로 밝히고자 했던 연세의 별, 이원철 박사. 우리나라 최초의 이학박사인 그는 지치지 않는 연구를 통해 우리나라 기상학과 천문학 양 분야의 기틀을 마련하고 발전시키는데 큰 공적을 남겼다. 그는 1915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1회 입학생이다. 재학시절 그는 수학 교수들도 풀어내지 못한 어려운 문제들을 척척 풀어내어 루퍼스 교수와 벡커 교수의 총애를 받았다. 이원철 박사가 4학년이 됐을 때, 그는 천문학을 공부할 기반이 마련돼 있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천문학에 관심을 갖게 돼 루퍼스 교수와 벡커 교수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이원철 박사가 박사학위 논문에서 연구한 독수리자리 에타별이 맥동변광성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후 그 사실이 알려지자 그가 연
특집
윤현주 기자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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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야 했던 별을 노래한 시인 윤동주. 1917년 중국 길림성 화룡면 명동촌에서 태어난 그는 29세의 젊은 나이로 해방을 앞둔 1945년 2월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안타깝게 순절했다. 하지만 그의 주옥같은 시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다 간 영혼은 우리들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그는 당시 기숙사였던 핀슨관 2층 오른쪽 복도 끝방에서 사색과 시쓰기에 힘썼다고 한다. 현재 그 곳은 ‘윤동주 기념실’로 만들어져 우리대학교에 몸 담았던 그의 삶을 느낄 수 있게 그의 친필원고, 각종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윤동주 시인의 체온이 담겨있는 주옥같은 시들은 그가 옥사하고 3년이 지난 후
특집
윤현주 기자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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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솔 최현배 선생은 주시경 선생의 뒤를 이어 한글 연구에 몰두한 대표적인 국어학자로 ‘한글의 사람’이다. 192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한 최현배 선생은 한글 연구와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조선어학회 창립에 참여한 최현배 선생은 동료학자들과 함께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했다. 이는 맞춤법 사용의 과학적 연구에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국학관련 서적을 많이 저술했는데, 특히 『우리말본』, 『조선고가연구』, 『조선어사전』은 일제시대에 쓰여진 ‘피나는 연구의 결정으로 나온 국학의 4대 명저’로 꼽힌다. 한편, 최현배 선생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겨레를 위해 『조선민족 갱생의 도』를 저술했다. 그는 이 책에서 겨레의 자각을 통해 민족공동체를 다시 살릴 수 있는 방안을 내놓았다.
특집
김민지 기자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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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 김윤경 선생(1922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마침)은 ‘한글 연구와 한글 펴기에 평생을 바친 한글 학자’다. 김윤경 선생은 17세에 서울 상동 청년학원에서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한글 가르침을 받은 후, 주시경 선생의 뜻을 이어 받아 한글연구에 온 인생을 바쳤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 창립회원이 된 김윤경 선생은 우리말, 우리글 연구와 정리·보급에 힘쓰는 한편, 조선어학회에서 최현배 선생과 함께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에 힘을 쏟았다. 김윤경 선생의 대표적 저서인 『조선문자급어학사』는 지금까지 내려오던 한글 연구를 분석화하고 체계화한 것으로 국학에 공헌한 바가 크다. 특히 이 책은 일제 시대에 씌어진 ‘피나는 연구의 결정으로 나온 국학의 4대 명저’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김윤경
특집
김민지 기자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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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저항하며 민족의 얼을 지키는 일에 평생을 바친 민족사학자 위당 정인보 선생.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정인보 선생은 18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상해에 가서 박은식, 신채호 등과 함께 ‘동제사’를 조직해 정칟문화 계몽활동을 주도했다. 1923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한 정인보 선생은 국문학·국사·한문 등 국학 전반에 걸쳐 강의하며 ‘국학’의 개념을 정립하는 데 힘썼다. 정인보 선생은 민족의 문화적 역량을 일깨우고자 「동아일보」에 1931년에는 『조선고전해제』를, 1933년에는 『양명학연론』을 연재하는 등 국학의 연구·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조상을 원망하며 실의에 빠진 민중들에게 ‘우리 역사가 낳은 큰 인물’로 단군, 세
특집
나은정 기자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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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도서관 앞을 지키고 있는 동상의 주인공, 이는 우리대학교의 초대 총장 백낙준 박사다. 그는 뛰어난 신학자로서, 교육자로서 연세의 기틀을 세운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백낙준 박사는 1922년 미국 파크대학을 졸업한 뒤 1925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거쳐 1927년 연희전문학교에 교육자로서의 첫 발을 내딛는다. 당시 연희전문학교는 일제의 탄압 대상이 돼 학교의 명칭이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바뀌는 등 많은 수난을 겪다가 1945년 광복 후 비로소 ‘연희전문학교’라는 이름을 되찾는다. 같은 해 12월 교장으로 취임한 백낙준 박사는 ‘대학준비위원회’를 구성해 종합대학교로의 승격을 위해 노력했으며 결국 1946년 8월 15일 연희전문학교는 ‘연희대학교’로 승격됐다. 백낙준 박사는 이 때부터 1
특집
양소은 기자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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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로를 따라 등교하는 연세인들을 두 팔 벌려 반기는 이가 있으니 바로 우리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설립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박사(한국명 원두우, 아래 원두우)다. 지금으로부터 1백 20년 전 그는 낯선 땅 조선에 와 ‘기독교 선교’와 ‘새로운 교육’의 사명을 실현하고자 헌신했다. 1877년 원두우 박사는 정동에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세웠다. 당시 교세 확장으로 인한 분열과 갈등에 회의를 느낀 그는 새문안교회 설립 이후 교파 통합의 정신을 실현할 새 교회 설립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는 대학 설립 등 다른 선교 활동에서는 그 뜻을 이뤘다. 우리대학교가 특정 교파에 속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 원두우 박사는 광혜원에서
특집
최아란 기자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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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자 세브란스병원의 모태인 광혜원을 창시한 호레이스 뉴튼 알렌 선교사는 1884년 가을 한국에 파견된 미국 최초의 의료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았다. 미국공사관의 부속의사로 조선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알렌 선교사는 1884년 12월 그의 의료선교사업에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한 갑신정변을 맞이하게 된다. 알렌 선교사는 당시 빈사상태에 빠진 민비의 조카이자 수구파의 거물인 민영익을 3개월 동안 정성스럽게 치료해 완치시켰다. 이 일로 그는 고종의 신임을 얻어 의료선교사업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세간에는 “상처 입은 사람을 고치기 위해 하늘이 보낸 특별한 사람”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왕의 시의(侍醫)로 임명된 알렌 선교사는 1885년 1월 의료선교를 위한 국립병원 설립안을 조정
특집
이상민 기자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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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역에서 우리대학교를 향해 걸어 올라오다 보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세브란스 병원이다. 이러한 세브란스 병원은 우리대학교의 상징, 떼놓을 수 없는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세브란스 병원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은 저조한 것이 사실이다. 지금의 세브란스 병원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과거, 세브란스 병원은 어떠한 길을 걸어왔던 것일까? 광혜원, 세브란스 병원이 되기까지 1884년 12월 갑신정변 당시 보수 세력파인 명성황후의 사촌동생 민영익이 급진 세력파의 칼에 부상을 당해 목숨이 위태로웠다. 이때, 조선에서 미국 공사관 공의를 맡고 있던 조선 최초의 의료선교사 알렌이 근대식 의료기술을 통해 민영익의 목숨을 살림으로써 궁중의 신임을 얻게 된다. 이를 계기로 그는 그동안 바래왔던 병원 설립
특집
양민진 기자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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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개교 120주년을 맞아 세브란스 새병원(아래 새병원)이 개원했다. 새병원에는 1천여개의 병상과 소화기병 센터, 뇌신경 센터 등이 들어서게 된다. 의료원 홍보과 류성 직원은 “기존 건물의 노화와 공간 협소 등의 이유로 새병원이 설립됐다”며 “기존 세브란스병원(아래 기존병원)은 검사, 임상 실험 등의 학문적 연구를 맡고 총괄적인 병원 행정 업무를 중점적으로 처리하는 한편, 새병원은 실질적인 진료업무를 담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새병원개원사업본부 사무국 운영팀 이인표 팀장은 “새 병원이 완공됨으로써 외래진료부의 유비쿼터스(Ubiquaters)시스템 구축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때에 진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러한 새병원 설립에 대해 권영선군
특집
김민형 기자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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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아이들과 우르르 몰려 앉아 구슬치기에 여념이 없던 때가 있었다. 특히 구슬을 한아름 따가는 날은 집에 들어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곤 했다. 그 때 그 시절의 가벼운 발걸음으로 부담 없이 찾아갈 수 있는, 추억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인사동 거리의 골동품 가게 ‘토토의 오래된 물건’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잡다하게 쌓여있는 물건들이 마치 오래된 고물창고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천장은 온통 옛날 영화 포스터로 도배돼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오리지날 포스터부터 국내에서 하나뿐이라 전해지는 신성일·엄앵란의 「맨발의 청춘」 오리지날 포스터, 그리고 ‘들개’, ‘팔푼이며느리’, 만화 ‘전자인간’처럼 우리에게 익숙치 않은 포스터들도 눈에 띈다. “어머나, 이게 머
특집
윤현주 기자
2005.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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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섹슈얼이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잡으면서 남성과 여성의 패션 차이는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굳이 나눠보자면 남성쪽은 꽃무늬나 분홍색 티셔츠와 빨간 자켓, 버클이 커다란 벨트 등이, 여성쪽은 히피풍의 집시 스커트와 80년대 고고장 패션인 굵은 헤어밴드와 쫄바지 개념의 레깅스 위에 미니스커트를 입는 것이 유행할 것이다.” TBJ 디자인실 윤소영 디자이너는 다가오는 올 여름에 유행할 복고 패션에 대해 이렇게 예측했다. ‘복고’라는 단어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이 ‘복고패션’이다. 90년대 후반부터 패션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복고패션은 이제 ‘이번에는 복고패션이 유행할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스타일의 복고패션이 유행할까?’로 초점이 변화했다. 이러한 흐름이 생기게 된 이유는
특집
양민진 기자
2005.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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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희망하고 기다리는 아름다운 미래는 우리 눈 앞에 펼쳐질 것인가? 우리 사회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서 최첨단의 세계를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시간에 쫓기고 획일적인 문화 속에 점점 중독돼 가고 있다. 이에 사람들은 해독제가 필요했고 일탈을 꿈꾼다. 바로 ‘복고’의 문을 통해서. “발전을 거듭하던 사회가 더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해 버리자 사람들은 기대감이 무너졌고 이에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었던 과거를 그리워하게 되었다”며 주간한국 패션칼럼니스트 박세은씨는 복고가 나타나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물질적 풍요보다는 심적인 풍요로움이 있었던 때로의 회기를 꿈꾸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사회에 복고 문화가 부각된 때는 21세기를 전후해서다.
특집
최종혁 기자
2005.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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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마스크와 홍콩할매를 기억하는지…?’ 아마 많은 연세인들은 빨간마스크나 홍콩할매를 무서워하며 그 퇴치법을 친구들과, 혹은 남몰래 혼자 연습했었던 추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제각각 다른 곳에서 살아왔지만 같은 시대를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형성될 수 있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에 즐겨 먹었던 추억의 군것질거리를 떠올려 보면, ‘아폴로, 쫀득이, 피쳐, 뽑기’등이 떠오른다.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치듯, 각종 군것질거리를 팔던 구멍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는 간은은양(영문·04)의 말처럼 초등학교 앞 구멍가게는 각양각색의 먹거리로 우리를 유혹하곤 했다. 흔히 불량식품이라고 불리며 전국의 초등학생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이런 먹거리들은 코묻은 적은 돈으로도 양쪽
특집
양민진 기자
2005.05.02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