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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공간을 뜨겁게 달궜던 KT의 인터넷 종량제 논의가 잠시 수면 밑으로 들어갔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잠 시일 뿐이다. 인터넷 요금을 둘러싼 논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다. 사실 인터넷 종량제 논의는 애초에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져 있었다. 그것은 첫째, 종량제 도입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KT측 논리의 허구성 때문이다. KT측 주장을 요약하면 ①현행 정액제 체제에서는 상위 5%의 이용자가 전체 트래픽 의 40%를 차지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인터넷을 적게 이용하는 사람들이 손해를 보고 있으며②전기나 수도 요금 을 종량제로 매기듯 인터넷 이용 요금도 종량제에 따르는 것이 형평에 맞고 ③인터넷 종량제는 과도한 인터넷 이 용으로 인해 나타나는 인터넷 중독 등 부작용
특집
연세춘추
2005.05.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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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사용한 만큼 돈을 내라.” 누군가에게 저런 말을 듣는다면 ‘에누리 없이 너무 원칙적인 것 아니냐’며 투덜거릴지 몰라도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 매우 합리적으로 여겨지는 이 주장에 대해 당당하게 ‘잘못됐다’고 말하며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인터넷 종량제다. 인터넷 종량제란 현재 한달 동안 정해진 요금을 내고 마음껏 쓰는 정액제와 다르게 인터넷을 사용한 만큼 돈을 내는 것이다. 이때 ‘사용한 만큼’이란 것은 사용한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사용한 용량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인터넷 종량제는 사용량이 많은 네티즌과 인터넷 기반 사업자들에게 불리한 반면, 이용량이 적은 네티즌이나 초고속 인터넷 사업자 측에서 볼 때는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서
특집
양민진 기자
2005.05.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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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학기간중 휴학을 경험해보지 않은 학생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휴학은 이제 대학생활의 일부분으로 보편화됐다. 종합서비스센터에 따르면 입대휴학을 제외하고도 매학기 약 2천5백여명의 학생들이 휴학을 신청하고 있다. 휴학을 하는 이유는 군입대, 공부, 여행 등 제각기 다르지만, 막연하게 휴학을 생각하고 있는 학생들은 다른 사람들이 휴학기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해한다. 연세춘추는 휴학생과 복학생 3인을 만나 각각의 휴학동기와 경험을 들어봤다. “휴학하면서 마음을 다잡았어요” 지난 2004년 2학기 복학한 서재협군(문정·03)은 지난 2003년 1학년 1학기만을 마치고 1년간 휴학한 이색경력의 소유자다. “막상 입학하고 보니 제가 생각하던 대학생활과는 거리가 멀더군요. 고등학교 시절과 별반 다를
특집
정진환 기자
2005.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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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학기중에 휴학할 경우 등록금은 어떻게 반환처리되나요? A: 학기 개시일 30일 경과전에는 등록금의 5/6, 30일이 경과한 날부터 60일 경과전까지는 2/3, 60일이 경과한 날부터 90일 경과전까지는 1/3, 90일 경과후부터는 반환하지 않습니다. Q.입대휴학을 제외하고 재학 중 휴학할 수 있는 기간은 모두 얼마나 되나요? A: 당초 입학자는 6학기, 학사편입·군위탁·복수전공자와 5학기 편입생은 3학기, 4학기 편입생은 4학기, 3학기 편입생은 5학기를 총 휴학할 수 있습니다. Q.신입생도 휴학할 수 있나요? A: 편입생, 복수전공자, 재입학생을 포함한 신입생은 입학 후 첫학기에 일반휴학을 할 수 없습니다. 단 입대(입영통지서 사본 첨부)나 질병(본교 보건진료소 또는 세브란
특집
정진환 기자
2005.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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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클럽(아래 나이트), 클럽. 환락의 장소? No! 새로운 자극을 위한 장소? Yes!’ 학업의 부담과 반복되는 나날에 지친 대학생들, 과연 어떻게 스트레스를 풀까? 그냥 단순하게 친구들과 일과가 끝난 저녁에 만나서 술잔을 기울이는 것 보다는 한번쯤 나이트나 클럽에서 춤을 추는 일탈을 꿈꿔보는 대학생들도 많다. 대학생들의 일주일이 끝나는 금요일, 한번쯤 상상해왔던 일탈을 하기위해 강남 ㅈ 나이트에 모여든 사람들을 만나봤다. 밤 11시, 이미 금요일의 나이트는 스테이지와 룸, 테이블 할 것 없이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현란한 조명, 그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일상을 잊은 채 비트에 몸을 실어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갖고 있었다. 나이트에서 만난 대학생 황아무개양은 “오
특집
강동철 기자
2005.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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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게 백양로를 거닐다 문득 ‘뭐가 매일 이렇게 똑같지? 뭐 화끈하고 신나는 일 없을까?’ 라는 불만에 빠져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자우림의 노래 ‘일탈’의 한 구절처럼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점프를, 신도림 역 안에서 스트립쇼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답답함에 가슴만 칠 뿐이다. 규정된 것에서 벗어나는 일탈에 대한 욕망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고민을 줄 뿐, 이를 해결할 방법을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이러한 고민에서 연세인 역시 자유롭지 못할터, 연세상담센터 조영아 상담원을 통해 일탈에 대한 연세인의 고민을 들어봤다. “저는 두개의 동아리에서 책임있는 직책을 맡고 있고 반활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점점 열정이 식어가면서 그저 책임감 때문에 하루 하루를 버티고 있는 중
특집
양민진 기자
2005.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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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 인생을 바꿔놓을 새로운 자극. 그 옛날 왕위가 보장됐던 석가모니는 그의 나이 29세 때 왕의 길을 버리고 고행의 길을 선택했다. 또한 유명한 화가로 거듭난 고갱 역시 선원과 은행직원이라는 안정된 일상을 버리고 화가의 길을 선택해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만들어 냈다. 석가모니, 고갱은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안정된 일상을 보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을 찾기 위해 일탈을 행했으며, 끝내 역사적으로 길이 남을 위인이 된 것이다. ‘진짜’ 정체성을 찾기 위한 방황 이들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듯 일탈은 때로 정해진 나의 길과는 또다른 새로운 ‘진짜’ 나의 길을 찾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일탈은 지루하고 새로울 것 없는 삶에서
특집
강동철 기자
2005.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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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고통의 땅, 평택. 지난 2003년 4월 주한 미군이 용산과 경기 북부의 미군기지를 이전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후, 9월 국방부에서는 평택·오산 지역의 땅 3백50여만평을 새 미군기지로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평택 지역의 미군기지 확장은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게 됐다. 오는 2008년까지 단계적으로 미군기지가 이전될 평택시는 1백년이 넘도록 외세에 점유당해온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일제시대 일본군의 비행장으로 사용된 이후 한국전쟁 당시에는 미군의 작전 수행을 위한 주요 시설로 이용됐으며, 그 후로도 한강 이남 지역 미군의 주요 기지인 캠프 험프리가 있어온 것이다. 때아닌 무더위와 함께 찾아간 평택은 또다시 미군기지가 이전해 오는 상황으로 많은 시민들의 의견이 양분된 채 심각
특집
강동철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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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똥집보다는 ‘Chicken Gizzard’란 단어가 더욱 어울리는 동네, ‘Dollar Exchange’라고 씌어진 환전상이 즐비한 동네. 바로 미군 제2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경기도 동두천시 보산동 캠프 케이시 앞, 소위 ‘기지촌’이다. 벚꽃이 우수수 떨어질 무렵 찾아간 이 동네에는 고요함과 한적함을 넘어 을씨년스러움마저 감돌고 있었다. “30분 동안 이 가게에 손님이 몇 명이나 오는지 보라고.” 이 동네에서 30여년째 보세 옷가게를 운영하고 있다는 정인근씨의 말이다. 실제로 기자가 있었던 30분 동안 이 가게를 찾은 손님은 손으로 꼽을 정도. 정씨는 “하루 매상이 예전의 20% 수준으로 급락했다”며 “이 동네에는 미래가 없어 곧 타지로 이주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에는 과거 달러
특집
정진환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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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현 교수(경영대·생산관리)는 지난 1979년 우리대학교 경영학과를 마친 동문이다. 우리대학교 창립 120주년을 맞아 김교수와 함께 교정을 거닐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지난 4일 낮 1시 김교수를 청송대에서 만났다. 정진환(아래 정): 청송대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요? 김태현(아래 김): 다들 ‘청’자가 푸를 ‘청’자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들을 ‘청(聽)’에 소나무 ‘송(松)’, 소나무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야. 용재 백낙준 박사가 지으신 이름이지. 아, 저기 비석에 글씨가 새겨져 있네. 참 멋진 이름 아닌가? 정: 네. 정말 그렇네요. 교수님의 학창시절 청송대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김: 지금은 공연도 많이 하고 단체 소풍도 많이 오는데 옛날에는 지금보다 숲도 더 울창하고
특집
정진환 기자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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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 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아무것도 모르는 촛불들아, 잘 있거라/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 「빈 집」 중에서 처녀시집이자 유고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을 통해 기형도 시인(지난 1985년 정치외교학과 마침)은 ‘1980년대 윤동주’로 불린다.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져 가세가 기울고 불의의 사고로 누이가 죽는 등 불우한 유년시절을 겪은 그는 어릴 적 느낀 죽음과 절망, 불안과 허무의 이미지를 이후 자신의 시에서 개성적인 문체로 표현했다. ‘연세문학회’에서 활발한 시작(詩作)활동을 한 기형도 시인은 우리신문사가 제정한 ‘박영준 문학상’ 소설부문, ‘윤동주 문학상’ 시부문에 응모해
특집
나은정 기자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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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의 사슬은 두 손으로 뿌리치고 짐승의 철퇴는 두발로 차버리자 그대 끌려간 그 자리 위에 민중의 웃음을 드리우자 - 이한열 추모비에 새겨진 이한열 유고시 중에서 전두환 군부정권의 폭압적 통치가 최후의 몸부림을 칠 무렵, 그들이 뺏을 수 있는 마지막 생명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당시 21살의 청년 이한열(지난 1986년 경영학과 입학). 이한열 열사는 지난 1987년 6월 9일, 경찰의 고문을 받다 숨진 박종철씨의 사망 1백일을 추모하는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서 전경을 저지하는 사수대의 역할을 하던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았다. 최루탄에 맞은 그는 한달여 동안 사경을 헤매다 7월 5일 결국 숨을 거뒀다. 나흘 뒤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진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는 1백만명
특집
이상민 기자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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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구석기 시대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 지금은 누구나 당연시하는 이 사실이 불과 40여년 전만 하더라도 근거 없는 주장이었다. 손보기교수(퇴임ㆍ고고학)는 공주군 석장리에서의 구석기 유물 발굴로 구석기 역사를 최초로 증명했다.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재학하며 사학 연구의 꿈을 키워온 손교수는 한반도에 구석기 시대가 존재할 수 없다며 유물 발굴을 강경하게 반대한 정부로부터 어렵게 발굴 허가를 받아내 대학원 사학과와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손교수가 지난 1967년 발표한 유물 발굴 결과는 한반도의 역사를 30만년 앞당기며 세계인의 감탄을 자아냈다. 한편, 손교수는 발굴 유물에 우리말 이름을 붙였다. 그는 타제석기, 마제석기를 뗀석기, 간석기로 바꾸고 찍개, 긁개, 주먹도끼 등 우리말 이름을
특집
최아란 기자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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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정학 교육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최이순 교수는 가정학 분야에서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여성’이라는 사회적으로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국의 가정학 교육의 기초를 세우고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오리건 주립대 공로표창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다. 최교수는 193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정과를 졸업한 후 1938년 미국 오리건 주립대 대학원을 거쳐 1939년에는 모교에서 처음 강단에 서게 된다. 그녀는 지난 1956년 우리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겨면서 ‘연세’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 후 최교수는 지난 1964년 가정대학 학장, 1968년에는 생활과학연구소장을 거치며 지난 1977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우리대학교에서 가정학 교육에 전념하게 된다. 또한 그녀는 초대
특집
최욱 기자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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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대를 학문 연구로 밝히고자 했던 연세의 별, 이원철 박사. 우리나라 최초의 이학박사인 그는 지치지 않는 연구를 통해 우리나라 기상학과 천문학 양 분야의 기틀을 마련하고 발전시키는데 큰 공적을 남겼다. 그는 1915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1회 입학생이다. 재학시절 그는 수학 교수들도 풀어내지 못한 어려운 문제들을 척척 풀어내어 루퍼스 교수와 벡커 교수의 총애를 받았다. 이원철 박사가 4학년이 됐을 때, 그는 천문학을 공부할 기반이 마련돼 있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천문학에 관심을 갖게 돼 루퍼스 교수와 벡커 교수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이원철 박사가 박사학위 논문에서 연구한 독수리자리 에타별이 맥동변광성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후 그 사실이 알려지자 그가 연
특집
윤현주 기자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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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야 했던 별을 노래한 시인 윤동주. 1917년 중국 길림성 화룡면 명동촌에서 태어난 그는 29세의 젊은 나이로 해방을 앞둔 1945년 2월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안타깝게 순절했다. 하지만 그의 주옥같은 시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다 간 영혼은 우리들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그는 당시 기숙사였던 핀슨관 2층 오른쪽 복도 끝방에서 사색과 시쓰기에 힘썼다고 한다. 현재 그 곳은 ‘윤동주 기념실’로 만들어져 우리대학교에 몸 담았던 그의 삶을 느낄 수 있게 그의 친필원고, 각종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윤동주 시인의 체온이 담겨있는 주옥같은 시들은 그가 옥사하고 3년이 지난 후
특집
윤현주 기자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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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솔 최현배 선생은 주시경 선생의 뒤를 이어 한글 연구에 몰두한 대표적인 국어학자로 ‘한글의 사람’이다. 192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한 최현배 선생은 한글 연구와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조선어학회 창립에 참여한 최현배 선생은 동료학자들과 함께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했다. 이는 맞춤법 사용의 과학적 연구에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국학관련 서적을 많이 저술했는데, 특히 『우리말본』, 『조선고가연구』, 『조선어사전』은 일제시대에 쓰여진 ‘피나는 연구의 결정으로 나온 국학의 4대 명저’로 꼽힌다. 한편, 최현배 선생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겨레를 위해 『조선민족 갱생의 도』를 저술했다. 그는 이 책에서 겨레의 자각을 통해 민족공동체를 다시 살릴 수 있는 방안을 내놓았다.
특집
김민지 기자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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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 김윤경 선생(1922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마침)은 ‘한글 연구와 한글 펴기에 평생을 바친 한글 학자’다. 김윤경 선생은 17세에 서울 상동 청년학원에서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한글 가르침을 받은 후, 주시경 선생의 뜻을 이어 받아 한글연구에 온 인생을 바쳤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 창립회원이 된 김윤경 선생은 우리말, 우리글 연구와 정리·보급에 힘쓰는 한편, 조선어학회에서 최현배 선생과 함께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에 힘을 쏟았다. 김윤경 선생의 대표적 저서인 『조선문자급어학사』는 지금까지 내려오던 한글 연구를 분석화하고 체계화한 것으로 국학에 공헌한 바가 크다. 특히 이 책은 일제 시대에 씌어진 ‘피나는 연구의 결정으로 나온 국학의 4대 명저’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김윤경
특집
김민지 기자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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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저항하며 민족의 얼을 지키는 일에 평생을 바친 민족사학자 위당 정인보 선생.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정인보 선생은 18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상해에 가서 박은식, 신채호 등과 함께 ‘동제사’를 조직해 정칟문화 계몽활동을 주도했다. 1923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한 정인보 선생은 국문학·국사·한문 등 국학 전반에 걸쳐 강의하며 ‘국학’의 개념을 정립하는 데 힘썼다. 정인보 선생은 민족의 문화적 역량을 일깨우고자 「동아일보」에 1931년에는 『조선고전해제』를, 1933년에는 『양명학연론』을 연재하는 등 국학의 연구·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조상을 원망하며 실의에 빠진 민중들에게 ‘우리 역사가 낳은 큰 인물’로 단군, 세
특집
나은정 기자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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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도서관 앞을 지키고 있는 동상의 주인공, 이는 우리대학교의 초대 총장 백낙준 박사다. 그는 뛰어난 신학자로서, 교육자로서 연세의 기틀을 세운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백낙준 박사는 1922년 미국 파크대학을 졸업한 뒤 1925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거쳐 1927년 연희전문학교에 교육자로서의 첫 발을 내딛는다. 당시 연희전문학교는 일제의 탄압 대상이 돼 학교의 명칭이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바뀌는 등 많은 수난을 겪다가 1945년 광복 후 비로소 ‘연희전문학교’라는 이름을 되찾는다. 같은 해 12월 교장으로 취임한 백낙준 박사는 ‘대학준비위원회’를 구성해 종합대학교로의 승격을 위해 노력했으며 결국 1946년 8월 15일 연희전문학교는 ‘연희대학교’로 승격됐다. 백낙준 박사는 이 때부터 1
특집
양소은 기자
2005.05.09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