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무엇을 보든, 무엇을 느끼든, 무엇을 생각하든, 결국 모든 것은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나이였다.”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中)모든 생각이 결국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것, 어떻게 해도 나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 무엇보다도 내 입장과 내 생각이 가장 중요했다. 밖으로 던진 모든 시선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나’라는 감옥에 갇힌 기분이었다. 그 감옥 안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다. 아무도 만날 수 없고, 누구를 진심으로 위할 수도 없는 고독한 공간이다.애초에 어떻게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네가 아니기에 네 생각을 알 수 없고, 네가 느끼는 감정을 똑같이 느낄 수 없고, 그래서 너를 사랑할 수도 없다. 너는
춘추는 한순간도 방심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제 부장 임기도 반 정도뿐이 남았구나, 하고 잠시 방심했던 찰나에 또 한 번의 폭풍우가 분다. 그간 동고동락했던 동기가 보도부를, 춘추를 떠난다.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른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면서도 충격을 잘 추스르지 못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하는 대상 없는 원망과 함께 두려움이 엄습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더 물러날 곳은 없다. 더욱 불살라 달리겠다고 다짐한다.춘추 입사지원서에도 일종의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대학의 문턱을 넘으면 세상을 다 가질 줄 알았던 나는, 명문사학의 타이틀로는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토록 기다렸던 젊음은 가감없이 지나가는데, 방황하며 오랜 시간을 낭비할까 두려웠던 마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아이들이 자라오면서 한 번쯤은 받아봤을 질문이다. 나 또한 어린 시절 같은 질문을 받았다. 살아온 날이 같지만, 살아갈 날이 다른 가족의 질문이었다. 대답이 곧 선택이라는 것을 인지하기에는 어린아이여서, 책임감 없는 답을 했다. 선택받지 못한 이에게 배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의도 없는 상처를 준 그 시절을 후회한다. 그때의 대답이 선택이 아닌, 그저 의미 없는 단어였음을 알아주길 바란다.가족에 대한 많은 정의와 기준을 세워봤다. 나의 기준이 무너지는 것을 무능하게 지켜보다 보니, 정의해야 할 가족들만 늘어났다. 지나쳐간 많은 인연 중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만난 이들이 있다. 서로를 이해하려 했지만,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스쳐 지나간 가족을 떠올려본다
“5학기 동안 기자로, 부장으로, 그리고 편집국장으로서 많이 배우고 성장했다.” 국장 임기를 마치면서 쓰는 마지막 글이라는 거창한 의미 부여치곤 진부한 글머리다. 자신이 속해있던 집단을 떠날 때쯤 다들 이렇게 말하더라. 어쩌면 내게도 입에 발린 말에 그쳤을지 모르는 이 문장은 내 5학기 동안의 소견을 여실히 드러낸다.내가 한창 기자로 활동하던 당시 학내는 총여학생회 논쟁으로 뜨거웠다. 총여학생회를 폐지해야 한다와 폐지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부끄럽지만 우리신문사에 들어오기 전까지 나는 학내 사안에 전혀 무관심하던 사람인지라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리고 곧 학내 사안을 보도하는 부서에 배정돼 엉겁결에 관련 취재를 전담하게 되면서 점차 무슨 일인지 알아갔다. 첫 느낌은 두려움이
『The Y』가 새롭게 출발합니다.치열했던 한 달의 고민은 단 한 문장으로 결론이 났다. 우리를 끝까지 지켜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신촌’이라는 울타리는 생각보다 안전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 다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연세춘추’라는 이름 아래, 우리가 선택한 것은 바로 ‘청년’이다.별지가 된 지난 2017년부터 『The Y』는 꾸준히 지역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아마 유지하고자 노력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지역성이 확실히 드러나는 코너가 몇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코너도 반 이상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신촌과 연희동 일대의 사회적 문제점을 짚는 ‘기획’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기사가 맛집이나 카페 소개에 그쳤다. 주거문제, 연애관, 여행 등 대
남겨진 자를 생각하다 23년이라는 길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사회적으로 이슈화된 몇 가지 죽음을 경험했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갑작스럽게 자살하기도 했고 비슷한 나이의 친구들이 수학여행 중에 많은 의문이 해소되지 않은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일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추모했고 시간이 지난 지금도 많이 기억한다. 우리는 이렇듯 살면서 많은 죽음을 경험한다. 나의 삶이 끝나는 죽음이 아닌 타인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그들을 기억한다.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기 때문에 적당한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달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남겨진 자가 되기 전까지, 정확히 그 순간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모든 사람은 삶과 죽음에 대해 한번은 생각해본다. 하지만, 남
내 이름 석 자를 달고 나가는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 앞에 앉는 것은 퍽 오랜만이다. ‘새삼스러운 설렘’이라 표현하는 것이 적당하겠다. 지난 해 봄, 첫 기사를 쓰던 순간의 느낌이 들 정도다. 글을 써 내려가기 전 제목부터 고민하는 사적인 버릇도 어색한 듯 익숙하다.「깊은 우리 젊은 날」. 기사를 쓰기 위해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상이 너무도 익숙해져 지루함마저 느끼던 때 인터뷰이로 만난 밴드의 노래 제목이다. 남다른 관심이 있던 인터뷰이도 아니었고, 노래도 이들의 대표곡이란 동료 기자의 말에 한 번 흘려들은 것이 전부다. 하지만 그로부터 꽤 오래 지난 지금도 저 제목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고, 이 글의 제목을 고민하던 와중에도 제일 먼저 떠올랐다. 대체 왜일
처음 카메라를 잡았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장난감을 쥐여준 것과 같은 설렘이었다. 그 후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수만 장의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는 내게 일종의 면죄부였다. '알 권리'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사람들의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카메라 뒤에 머무르며 마음껏 대상을 바라보고 탐닉했다. 두꺼운 렌즈는 타인에게 시선을 던지는 행위에서 오는 죄책감을 가려줬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 대상을 중시한다는 것이다"수전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에 나오는 말이다. 불행히도 기자 생활의 반이 지날 동안, 나는 '대상을 중시한다'는 것이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보여주는 거라고 이해했다. 눈앞의 대상에 개입할 필요는 없다. 그저 묵묵히 대상을 바라보며
나에겐 과거의 것들을 되돌아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어릴 적부터 세상은 앞으로만 나아간다고 믿었고, 무엇이든 과거보다 현재가, 현재보다 미래가 낫다고 평가해왔다. 그래서 좋든 싫든 지난 장면을 곱씹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요즘은 자꾸만 과거의 순간들을 떠올리게 된다. 세상은 자율주행 같은 게 아니었다. 묻어두지 말고 제대로 후회해야만 변할 수 있는 거였다.나는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참 싫었다. 주로 선생님 때문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그중에는 성폭력도 있었다. 2015년, 나이 마흔을 훌쩍 넘긴 남교사는 숙제를 해오지 않은 벌이라며 여학생에게 안마를 시켰다. 지나서야 성희롱인 줄 알게 된 종류의 발언은 일상이었고, 여자 선배들은 ‘이상한 선생님’이라며 조심해야 할 남
무관심하고 무지했던 지난 나를 반성한다 학보사 기자를 하기 전까지, 아니 어쩌면 학보사 기자를 시작하고 나서도 난 내 의견이 없는 사람이었다. 살아가면서 어떤 가치를 중점으로 둬야 하는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였던 것 같다. 정의로운 세상을 바란다는 마음으로 언론인의 꿈을 갖고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정의로운 세상이, 내가 바라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몰랐다. 그러다보니 내가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더라.지금껏 나는 어떤 문제에 대해 나서서 목소리 높여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총여학생회가 사라지던 순간에도, 청소·경비 노동자들이 백양로로 나와야 했을 때도 내 귀와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래서 취재를 하기 전에는 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부당함에
우린 모두 각개전투 중 나는 광화문 근처에 산다. 광화문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모이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없이 광화문에 드나들었지만 나는 학보사 기자가 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의 외침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안타깝지만 ‘남의 일’이었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추운 겨울 광화문 지하철역을 지나던 나는 한 여성에게 붙잡혔다. 옆에는 나이 지긋한 아저씨 몇 분이 핑크색 판넬을 들고 전동휠체어에 앉아있었다. 장애등급제 폐지 반대, 중증장애인, 사각지대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한 번만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말에 멍하니 서있었다. 속으로는 집 가는 길을 생각하며 고개만 대강 끄덕였다. 이야기가 끝날
내가 17학번으로 입학한 이후 세 번의 봄을 더 지낼 때까지 총학생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총학생회가 나오기까지 진행된 3번의 선거 중 한 번은 먼발치에서 파행에 치닫는 선거를 무심하게 관전했고, 나머지 두 번의 선거는 연세춘추 기자로 직접 현장을 발로 뛰어다니면서 경험했다. 삼세번 끝에 내가 학교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총학생회가 생겼다.약 2년만의 비대위를 뚫고 결성된 총학생회는 열심히 일했다. 그동안 산적해있는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라고 전(前) 총학생회장은 말했지만 기실 자기 존재의 당위성을 어떻게든 피력하려는 총학생회의 처절한 몸부림이라고 보는 게 정확하겠다. '학생회'라는 단어만 들어도 고리타분한 인상을 주는 이 시대에서 총학생회는 자기 존재 이유를 학생들의 편의와 복지에서 찾았고 그래야만 했
“기자님, 그건 나이브한 생각이죠” 인터뷰 도중 취재원이 말했다. 대화의 맥락상 칭찬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동안 ‘순진한’ 정도로 생각해온 나이브의 뜻과는 분명 거리가 있었다. 사전을 찾아봤다. (경험·지식 부족 등으로) 순진해 빠진, (모자랄 정도로) 순진한 사전에 적힌 글자에 혼나는 기분이었다. 사전은 친절히 설명하고 있었다. 내가 나이브하다는 소리를 듣는 건, 경험과 지식이 부족한 탓이라고. 이때의 순진함이란 모자라다는 뜻이라고.교실에 얌전히 앉아 시키는 공부만 했던 나는, 세상 물정을 몰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에 감정적으로 분노했지만, 왜 분노해야 하는지는 잘 몰랐다. 미르·K스포츠재단, 비선실세, 승마 같은 단어들은 알아도, 그것들을 연결할 줄은 몰랐다. 이유
학생회관 침대에서 노곤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회의가 끝나고 10분 정도 눈을 붙인다고 아무 곳에나 누웠는데, 야속한 시침은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휴대폰 속에는 첫눈이 내렸다며 한껏 신난 메시지들이 쌓여있었다. 덩달아 신나지는 않았다. 난방이 다 꺼진 학교에서 쓸쓸히 첫눈을 맞이했다는 씁쓸함도, 곧 성탄이 다가온다는 설렘도 들지 않았다. 그저 문득 나도 밖에 나가 첫눈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학관 창틀에 맺힌 눈 결정마저 녹아 흐려져, 냉랭한 물기만을 남겨갈 즈음이었다. 그렇게 짧게 스쳐 간 눈이라지만 올해 첫눈 소식은 나로 하여금 지난 열한 달을 돌아보게 했다. #스물둘2019년. 기자가 되겠다는 오랜 꿈을 놓은 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상처와 위안을 얻은 해. 사실
경기도 시흥시 어느 농로 위 주차된 차 안에서 일가족의 시신이 수습됐다. 30대 중반의 부부와 어린 두 자녀였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이 부부가 7천만 원이라는 빚으로 고통스러워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부부는 사망 전날 부모님과 전화 통화를 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곧 찾아뵙겠다’는 말을 남겼다. 일가족의 시신이 발견된 날은 어버이날을 사흘 앞둔 날, 그러니까 어린이날이었다. ‘5월은 가정(家庭)의 달’이라는 말을 새삼스레 곱씹게 된다. 부부는 빚을 갚기 위해 개인회생절차를 밟고 있었다. 남편이 공장으로 출퇴근하며 매달 80만 원씩 상환해나갔다. 그러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남편이 직업을 잃었다. 갑작스러운 실직은 부부를 극단으로 몰았다. 채무를 이행하던 중 실직한 사람을 구
#성장무능이 죄가 되는 사회다. 고난이나 갈등을 극복하고 성장한 사례를 묻는 자기소개서가 그 증거다. 어떤 시련이든 딛고 일어나 성장한 사람이 바로 사회가 원하는 인재상이라는 뜻이니까 말이다. ‘무능은 죄악’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2년간의 기자 생활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일까. 무능을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무능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애써왔다.무능이 죄악이라는 생각은 대학 입학 후 더욱 확고해졌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우리신문사에 입사했다. 무능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 자신을 향한 수많은 채찍질을 악착같이 버텨냈던 2년이다. 기자 생활을 하며 원하는 속도와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나의 무능을 감추기 위해 발버둥 치기도 했다.나의 무능을 받아들이기란 너무 어려
무엇이 맞고 무엇은 틀렸는가. 기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후 쟁점으로 떠오른 정치적 사안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곤 한다. 하지만 복잡한 세상일을 양분하기는 항상 쉽지 않다. 하나의 쟁점에 대한 찬반양론을 듣고 있노라면 혼란스러워진다.‘동물국회’가 오랜만에 펼쳐졌다. 선거법 개정안과 공수처 신설안이 포함된 여야 4당 합의안을 패스트트랙에 태우기 위해서는 사법개혁특별위원회와 정치개혁특별위원회를 통과해야 한다. 바미당 일부는 공수처 신설안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바미당 김관영 원내대표가 패스트트랙 지정에 반대하는 의원들을 다른 의원으로 사·보임했다. 여야 4당의 합의에 반발해왔던 자한당은 바미당 패스트트랙 반대파에 가세했다. 이들과 여야 3당·바미당 패스트트랙 찬성파는 국회에서 충돌했다.동물국회를
멋진 기자가 돼 멋진 글을 쓰고 싶었다. 사회의 부조리함을 꼬집어 세상을 바꿔나가는 그런 멋진 기자. 그래서 「연세춘추」에 들어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보도나 사회부가 아닌 매거진부를 선택한 이유는 말랑말랑한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어차피 딱딱한 글은 나중에 많이 쓸 테니까, 지금이 아니면 이런 글을 쓸 기회는 없을 테니까.예상대로 예쁜 카페, 신촌의 맛집, 나만 알고 싶은 술집을 찾아다니는 건 그 자체로 매력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나만의 문체와 스타일로 풀어나갈 수 있는 건 더더욱. 벌써 2년이다. 향긋한 찻잎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히던 ‘아뜰리에안’. 밥 굶고 다니는 자취생에게 따뜻한 집밥을 차려주시던 ‘감성매인’. 지금은 손님이 너무 많아져 자주 가지 못
#왜냐하면‘장래희망’을 적는 칸을 보면 여전히 주춤한다.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에도, 학회나 동아리 따위의 지원서에도, 오늘날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주고받는 질문에서도 여전하다. 나의 장래희망을 묻는 말에서 나는 핵심 없는 변두리투성이 답변만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누구나 멋진 장래를 살아가는 줄로만 알았다. 찰떡같은 천직과 영화에 나올법한 사랑 이야기는 살다 보면 당연하게 맞이할 일일 것만 같았다. ‘장래희망’이 언젠가는 내게 뚜렷하게 찾아올 걸 아주 열망했기에 뜻하던 바가 엉클어질 때는 홀로 한없이 침몰할 때도 잦았다. #그래서어떤 업(業)을 하고 장래를 살 건지란 질문에는 여전히 답을 못 내리겠다. 최근에야 나와 적당히 타협한 것이, 우선 ‘어른’이 돼보자는 것이다. 우습지만 장
최근 몇 년간 가장 큰 화두는 단연 페미니즘이다. 한 달에도 수십 가지의 화젯거리가 생기는 우리나라에서 페미니즘이 오랜 기간 동안 부동의 1위를 지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포괄성이 아닐까. 세상의 절반은 여성이기 때문에, 또 나머지 절반은 남성이기 때문에 사실상 페미니즘은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 특별히 뭘 공부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부여된 성별로 살아온 역사가 여러 주장의 근간이 된다. 끊임없는 논쟁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인터넷 기사 댓글이나 익명 커뮤니티들을 보다 보면 페미니즘 관련 논쟁이 평행선을 달리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는 이렇다. ‘네가 여자로 살아봤느냐’ ‘그러는 넌 남자로 살아봤느냐’ 혹은‘네가 군대를 가봤느냐’ ‘